[2부 2. 프랑스의 참패 그리고 유린... 패배한 나라의 고통]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10분 독일은 드디어 프랑스 침공을 위해서 유럽의 서쪽으로 향합니다.

2년간 전쟁의 징후가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곧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고 2년간 준비는 충분했습니다.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사기충전, 승리를 위해서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는 달랐습니다.

 

활을 쏘는것과 총을 쏘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전쟁에서 패하고 프랑스 북부의 항구 '됭케르크'까지 밀려갑니다.

 

지난 시간 왜 프랑스군이 대패하며 '됭케르크'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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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 제2차 세계대전_2부 프랑스의 참패

[2부-1. 독일군의 신들린 전투와 아돌프 히틀러의 전략] 지난 시간에는 독일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독일의 히틀러가 어떻게 유럽의 다양한 지역을 폭격하고 유린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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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이른바 '낫 베기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1940년 5월 28일 프랑스-연합군은 모두 포위되었습니다. 

 

벨기에 왕은 군대를 이끌고 독일에 항복을 하였습니다. 

영국군은 해안 쪽으로 일단 퇴각을 했죠.

 

독일의 낫베기 작전으로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까지 밀려나게 된 연합군

 

프랑스의 1차 세계대전의 영웅 '맥심 베이강' 장군이 새롭게 임명되지만

'베이강' 장군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해안 쪽으로 퇴각을 하게 되죠. 

 

됭케르크의 프랑스-영국 연합군

 

윈스턴 처칠

1940년 5월 29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질'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해 구조를 지시하였습니다. 

 

'됭케르크' 외곽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릅니다.

그리고 독일은 '됭케르크'의 연합군에 진격하지 않으면서 '괴링'의 스투카만 적당히 투입합니다. 

 

됭케르크 외곽의 프랑스군
독일의 폭격기
독일의 폭격을 받고 있는 영국 선박

'됭케르크'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극적이었습니다.

40만 병력이 무력하게 해변에 누워 그들을 구출해줄 선박만 기다리고 있는 그때는

독일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을 그냥 영국으로 보내줍니다. 

 

이로써 영국국 21만 8천 명과 프랑스군 12만 명의 철수작전은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영국군은 구조되었지만 모두 누더기 상태였습니다. 

 

영국 호버 해안에서 선박을 내리고 있는 영국군
군화도 없이 선박에서 내리고 있는 군인

프랑스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는 영국 여인

영국군은 재무장 센터로 다시 보내졌습니다.

모든 영국 국민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흥분을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전쟁은 철수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그러나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에 '됭케르크 정신'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영국인들은 전쟁의 무자비함과 적국 나치 독일의 파괴력을 실감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은 사라지고 전국의 무장화를 위해서 매진하기 시작했죠. 

 

1940년 6월 4일 국내 패배주의자와도 싸움을 해야 했던 '처질'이 입을 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어조였습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상륙지점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겁니다.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윈스턴 처질-

 

1940년 6월 4일 독일은 '됭케르크'를 점령합니다.

엄청난 전리품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선전 부대에서 이것을 그대로 촬영했습니다. 

 

됭케르크를 점령한 독일군

 

연합군이 두고간 차량
해안에 버려진 영국군의 포
됭케르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독일 병사
해변에서 프랑스의 축음기로 노래를 듣고 있는 독일군

이후 공격은 계속 이어졌고 프랑스는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레노'총리와 당시 국방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은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샤를 드골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연설합니다.

 

'전쟁 포고문이 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에게 방금 전달되었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인들에게 연설하는 '무솔리니'

'무솔리니'는 '론 계곡'과 '마르세유'를 비롯해 '포르시카'와 '튀니지'의 무장해제 등을

자기 몫의 전리품으로 얻을 욕심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배신당했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 독일군.
프랑스 도시에 있는 독일 전차

프랑스 '파리'는 무방비 도시를 선언합니다.

즉 '바르샤바'나 '로테르담'처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그냥 넘겨주겠다는 겁니다.

 

이 시기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졌습니다. 독일군이 다가왔습니다.

1870년 프러시아 군처럼 죽이고 강간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피난 하고 있는 프랑스 시민
파닌길에 오른 파리 시민

프랑스 전체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대탈출이었습니다.

수백만명의 프랑스인들이 마지막 보루인 '누아르'로 몰려들었습니다. 

 

독일군은 계속 전진하고 있고 프랑스 하늘에선 언제든 독일의 '스투카'를 볼 수 있었죠.

 

피난객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는 독일의 스투카
폭격을 피하고 있는 프랑스 시민
폭격을 피하고 있는 프랑스 가족

1940년 6월 14일 새벽, 드디어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였습니다.

 

파리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독일군

독일군이 가장 먼저 한일은 프랑스 정부에서 미처 파기하지 못한 비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파이들, 유태인들,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명단과

 

1919년 독일의 치욕을 안겨줬던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이

즉시 히틀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940년 6월 15일 프랑스 시민의 민족 대탈출은 멈춰 섰습니다.

모든 다리는 폭파되었고 이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갈곳이 없는 프랑스인들

 

이제 남은 희망은 싸움이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보르도'의 '패탱' 역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항복하는 프랑스군

독일은 사정없이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한때는 막강한 군대력을 보유한 프랑스는 이제 엉망이 되었습니다. 

 

 

무려 185만 명의 프랑스 군사들이 전쟁 포로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장교 3만 6천 명, 장군 176명도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
전쟁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포로들 중엔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들도 많았습니다. 

독일의 영화제작자가 그들을 촬영했습니다. 독일의 선전 뉴스는 이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계속 보여줍니다.

 

프랑스 식민지의 병사
프랑스 식민지 병사

이들을 보여주면서 선전 매체는 이렇게 썼습니다. 

 

'연합군은 말합니다.
우리의 '중세기적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이죠. 
그 '문명의 수호자' 들을 보십이오!!'

-독일 선전매체-

 

이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먼저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책략에 밀려서 강제 사임을 합니다. 

그의 후임으로 '필리페 페탱'이 프랑스 정부의 수장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6월 17일 페탱 총리는 휴전을 하겠다고 연설을 합니다.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한 건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 수상 '필리페 패탱-

 

독일은 이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듣고 환호하였고

프랑스 '샤를 드 골' 장군은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새로이 연설합니다. 

 

'프랑스의 명예는 우리의 동맹군들과 함께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1940년 6월 18일 '샤를 드골'-

 

1940년 6월 22일 독일의 '히틀러'는 파리에 도착했고

1919년 독일에 치욕을 되갚아줄 상황을 연출합니다. 

 

독일의 패배를 확정 지었던

1918년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던 열차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의 복수는 완벽했습니다.  

 

프랑스의 '헌징거' 장군이 프랑스의 사절단을 대표합니다. 

 

독일의 통역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통렬한 비 난문을 읽었고

'히틀러'는 한마디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프랑스 대표단에게 휴전 조건이 전달되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에 도피해온 반나치주의 독일인들을 넘겨주라는 조건이었습니다. 

 

'헌징거'는 협상해 보려 하지만 독일은 거절합니다. 

 

'헌징거'는 보르도의 프랑스 정부에 전화를 걸었고 독일의 비밀 경찰이 이 통화 내용을 녹음했습니다. 

 

 - '헌징거 입니다.'
- '말하게...'

- '끝났습니다.'
- '끝났다고?'
- '네 장군'

- '잘 처리해 줘서 고맙네'
- '네 저를 이해하시죠?'
- '...'
- '그럼 이해하지'

 

열차안에서 협상하고 있는 헌징거

 

프랑스는 이제 완전히 독일로 넘어갑니다.

프랑스의 모든 것이 바뀌어 갑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물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모든 것이 전리품이 됩니다. 

 

전차 2천대, 포 5천 문, 소총 30 만정과 400만 발의 달하는 총알이 그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육군 보급 창고에서 수십만 벌의 군인 내복 더미가 발견됩니다.

 

이 내복은 훗날 독일 군들에게 지급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모든 공장, 항구, 정부 그리고 개인 재산까지 모두가 전리품이었습니다.

 

프랑스 육군 보급대의 내복

 

전쟁을 선포한 것은 프랑스였으니 그 대가로 하루에 1억 달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헌징거 장군은 프랑스의 패배 조건을 실행하는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갑니다.

독일은 최소한의 군대를 남겨놓기 위해서 일부 프랑스가 부분적인 주권을 유지하게 합니다.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 지역은 프랑스의 대부분의 항구를 포함하고 있고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쪽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며

 

비 점령지역은 자유지역으로 프랑스 정부가 담당하며 새로운 수도는 비시로 결정 납니다.

그래서 '비시 정부'가 생겨나게 됩니다. 

 

'패탱' 수상이 프랑스의 작은 휴양지 비시로 들어서서 정부 회의를 진행하지만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의 '비시 정부'는 여러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국에 가담하지 않고 항구에 비무장 상태로 계속 정박하고 있으라는 것이 히틀러의 요구였습니다.

 

반대로 '처칠'은 선박들이 독일의 손아귀로 들어갈 것을 우려해 영국 해군의 명령의 내려 제압하려 합니다. 

1940년 7월 3일 영국 해군은 프랑스 최대 해군 기지인 하나인 알제리의 '메르스 엘케 비르'로 향합니다.

 

 

 

처칠은 모험을 하지 않았고 프랑스 함대에 최후통첩을 합니다.

영국에 편에 서서 스스로 배를 침몰시키든

카리브해까지 호위를 받고 가서 무장해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영국은 폭격을 개시했습니다.

프랑스 전함 2척이 심하게 부서졌고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전사했습니다. 

 

영국 국민과 전 세계, 다른 누구보다도 미국을 향해 자신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처칠'은 독일군의 영국 상륙을 도와줄 수 있는 옛 동맥 국의 함대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비시 정부'는 영국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합니다. 

 

독일은 프랑스 북부의 '건지 섬'과 '저지 섬'을 점령합니다.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죠. 

 

 

1940년 7월 영국은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준비하며 독일의 침공에 대비합니다.

가장 다급한 준비는 아이들을 안전한 시골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죠. 

 

그리고 여자들도 전쟁 준비를 합니다. 

여자들도 독일 낙하산 부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표지판을 지우고 있는 영국인
아이와 작별하는 엄마
총기를 배우고 있는 영국 여자

남자들은 1차 대전의 베테랑들까지 지역 방위대에 자원합니다.

됭케르크에서 구조해온 군대가 재정비하는 동안 자원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소총과 대공포들이 공급되었고 모두가 전력을 가다듬었습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이 연설합니다. 

 

'영국의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따라서 굳건히 사명을 완수하며 잘 견뎌 낸다면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천년 더 지속된 후에도 후손들은 말할 것입니다. 

지금이 가장 찬란한 시대였다고...'

-윈스턴 처칠-

 

처칠의 주요 무기는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항공기 '스핏 파이어'와 항공력이었는데

당시 '스핏파이어'는 세계 최고의 전투기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독일보다 전자전에 앞서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레이다를 사용했죠.

레이더는 항공기를 감지하고 파일럿들에게 적의 위치를 전송했죠.

 

영국의 '스핏 파이어'

 

대영제국 곳곳에서 파일럿들이 모여들었고 독일에 패배한 국가들의 파일럿도 영국에서 자원했죠.

폴란드,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였습니다.

드골 장군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도 합류했습니다. 

 

영국 군대 자원자 중에서는 옥스퍼드, 캠브릿지 대학생들도 많았는데

리처드 힐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장발의 아이들로 불렸습니다. 환멸에 빠진 응석 받이였죠.
언론에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했습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영웅적인 행동을 요구하기보다는
우리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죠.
우리 제멋대로 일진 모르지만 히틀러에 물든 젊은이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리처드 힐러리'-

 

 

독일 파일럿들은 모두 히틀러의 유겐트 훈련단에서 복수를 벼르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무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수장 '헤르만 괴링'은 인기가 높았습니다. 

 

'헤르만 괴링'

사치를 즐겼던 괴링은 파리의 호텔에 묵는 경우가 많았고 룩셈부르크 궁전을 공군 기지로 삼았습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며칠 만에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을 물리치고 독일의 상륙에 일조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독일 공군은 프랑스의 모든 비행장과 설비, 장비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실력이 좋았습니다.

 

점령지 프랑스 비행장에서 이륙한 독일 전투기들은

영국 해협의 호위 선단을 폭격하고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폭격했습니다.

 

폭격받고 있는 호위 선단
영국 남부의 비행장 폭격 장면

독일은 영국 전투기 500대를 격추시켰지만 독일 전투기 1,000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영국 파일럿들은 전력을 쏟아부으며 버텨 냅니다. 

 

영국 '스핏 파이어'

 

히틀러는 영국 침략 계획을 보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첫 실패였죠. 그는 이제 야간 폭격에 좀 더 의지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도시들이 파괴되면 영국은 항복할 것이다. '

'히틀러'

 

독일의 폭격기들이 매일 영국의 도시를 폭격했습니다. 

전격 작전이었죠.

 

폭격받은 영국
독일 폭격으로 사망한 영국인

영국 사람들은 존경스러울 만큼 잘 버텨 냅니다.

집집마다 마당에 방공호를 팠고, 런던 시민들은 지하철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습니다.

 

방공호를 파고 있는 영국인
폭격을 피해 지하철에서 잠자는 영국인

그들은 자신감이나 유머감각을 절대 잃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프랑스에 말합니다. 

 

'히틀러가 잿더미로 만들겠다던 이 곳 런던에서 
우리 국민은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

 

히틀러는 답답했습니다.

그는 처칠을 유태인에 사로잡힌 반미국인 주정뱅이라고 하며

이후로 그는 좌절할 때마다 유태인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바르샤바 '게토'

 

3m가 높은 벽이 세워져 50만 유태인을 가둬놓았습니다.

남자, 여자, 아이들, 노인들 모두가 여기 가둬졌고 이들은 몰랐습니다. 

끔찍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모두가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줄은...

 

 

 

독일은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했고 이제 영국과의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 점령한 나라...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등 모든 지역에서 고난이 시작됩니다.

 

다음 회는 영국이 어떻게 독일에 대응하고 또 독일은 어떤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 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합니다. 

 

 

[2-1부 1. 독일군의 신들린 전투와 아돌프 히틀러의 전략]

 

지난 시간에는 독일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독일의 히틀러가 어떻게 유럽의 다양한 지역을 폭격하고 유린하면서

연합군에게 충격 요법을 썼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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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 제2차 세계대전_1-2부 히틀러의 유럽 침략...

[1부-2. 히틀러의 유럽 침략...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 지난 1부-1에서는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독재정권 확립과 러시아와의 불가침 조약인 '독소조약'의 체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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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일은 연합군과 정면 승부를 펼치려고 합니다.

프랑스-영국 연합군과 독일군의 수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독일 열세였죠. 

 

1940년 5월 9일 프랑스 아르덴 지역의 작은 도시의 학교는

여느 때와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하며 웃고 있었죠. 

 

1940년 프랑스 아르덴의 학교 모습
1940년 프랑스 아르덴의 학교에서 율동하고 있는 프랑스 소녀

하지만 이것이 이 아이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35분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 

 

독일 공수부대

독일 공수부대가 네덜란드에 낙하합니다. 

이는 300만 침략군의 최선방 전초 부대입니다. 

 

독일은 1914년과 같이 네덜란드를 거쳐 벨기에를 공격하여 프랑스로 향하는 척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의 미끼였습니다. 

 

독일의 벨기에 공격

프랑스의 가믈렝 장군은 자신만만했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전투 없는 전쟁 중 가믈랭 장군은 만반의 준비를 다했죠.

독일군의 숫자는 연합군보다 적고 연합군은 이미 오랜 시간 준비하였습니다.

 

프랑스 가믈랭 장군의 기동사단

 

프랑스의 정예부대인 기동 사단들과 영국의 원정군 전체는

벨기에를 향해 진군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담대한 전투부대원이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죠. 

 

하지만 히틀러는 사령부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미끼에 걸려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사령부에서 흐믓해 하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기쁨에 겨워 울 것 같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군 참모총장인 괴링에게 명령합니다.

벨기에 상공을 폭격하지 말고 연합군이 벨기에 깊숙이 진군하도록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군 배후를 노리는 독일 침략군의 이동 동선

그 사이 진짜 독일 침략군은 아르덴 숲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르덴 숲을 진군하는 독일군

 

프랑스 최고 사령부는 어떤 탱크도 숲이 우거진 아르덴을 넘어올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앞길을 막은 것은 오직 교통체증뿐이었죠. 

 

차가 밀려 진군이 느려진 독일군

그 사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는 사람들 중에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피난길에 오릅니다.

모든 것이 두려움이었고 모든 사람이 간첩으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5월 11일 동틀 녘 독일군 공수부대는 벨기에 영토에 낙하합니다. 

목표는 벨기에 방어의 핵심인 알베르 운하의 에방에마르 운하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운하 점령을 위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독일군

여긴 절대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곳이었죠.

하지만 독일군은 용감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독일 병사가 운하를 지키는 벙커에 폭약을 투하하는 장면

요새는 함락되었습니다. 요새가 함락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파리로 향하는 열차에 타려고 애썼습니다.

벨기에 피난민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가축 수송 열차에 타서 이동했습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점령하자 유럽의 공포가 확산됩니다.

이런 공포에 대응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순순히 복종하거나 달아나거나죠...

 

벨기에 피난민

 

역사적으로 볼 때 농부들은 자신들의 농작물과 가축을 버리고 갈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늦게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위대한 벨기에 시인 에밀 베르하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이들 앞에 놓인 것은 끝없이 펼쳐진 도로뿐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불운과 불행밖에 없다.

- 에밀 베르하른 -  

 

독일의 공중폭격

독일은 공중 폭격을 드디어 시작했습니다. 

주요 도시들 도로와 다리...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북부와 동부 프랑스 도시들이 폭격을 당했습니다. 

프랑스는 이제 현대전의 현실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폭격받은 프랑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항구가 불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이미 항복을 선언한 나라였죠.

아돌프 히틀러의 또 다른 전쟁 범죄입니다. 

 

윈스턴 처칠

 

이 시기 영국에선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 됩니다.

역사란 참 희한합니다. 항상 경쟁자를 탄생시키니 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말합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운명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처럼
대영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의 승리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하지만 연합군의 상황은 계속 악화일로에 들어섭니다. 

아르덴 숲을 지난 독일은 프랑스 방어선을 향해 단 3일 만에 전진하였고

독일 병사는 마치 외계 병사들처럼 프랑스 군을 쓰러트리며 전진합니다.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쏘아대며 단 하루 만에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짜 장애물은 프랑스군이 아닌 강이었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독일군은 다리를 건설하려 하고 프랑스 군은 그곳을 폭격합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결국 다리를 건설합니다. 

5월 13일 밤입니다. 

 

52세의 프러시아 출신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뛰어난 기갑전 전략가로

탱크를 이용한 신속한 공격으로 유명했습니다. 

 

'Blitzkrieg 블리츠 크리크' 전격전은 적이 준비한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작전입니다. 

 

전격전으로 유명한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운하를 건너고 있는 독일 탱크
독일군 보병

 

독일의 전투기 스투카

 

독일은 5월 13일 운하를 건너고 있습니다. 

탱크가 지나가고 그 뒤에 보병이 뒤따르며 독일의 우수한 전투기 스투카가 그 뒤를 따릅니다. 

 

이제 무엇이 이 독일군을 막을 수 있을까요?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놀라서 영국의 처칠에게 전화를 겁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전투에 패했어요

-폴 레노-

 

연합군은 벨기에에 발이 묶여 있어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당국자들은 날로 들어가는 피난민에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피난민

 

정보는 귀했고 무성한 소문만 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령부는 방금 독일이 해안을 향하고 있고 방금 연합군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히틀러의 낫 베기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세단을 점령한 독일군이 프랑스 북부 해안으로 향해 연합군을 포위한다. 

 파리에서 반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드골 대령에겐 탱크를 몰고 가서 전공을 세울 기회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탱크는 독일 탱크보다 우수했고 숫자도 많았죠. 

 

프랑스 드골 장군의 탱크 부대

 

하지만 공군 지원 없이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탱크는 독일의 스투가 의 사냥감이 되었습니다.

 

패배하는 프랑스의 탱크

독일군의 탱크는 프랑스 북부의 마을과 도시들을 빠르게 통과했습니다. 

프랑스 군은 독일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모든 국지적 저항을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독일군이 영국 해협에 다다릅니다.

 

영국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독일군
됭케르크까지 몰린 연합군

1940년 5월 28일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모두 포위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총리 폴 레노는 가믈랭 장군을 폐위하고 새로운 구세주를 찾습니다. 

그가 찾은 인물은 1918년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72세의 맥심 베이강 장군입니다. 

 

프랑스의 새로운 사령관 맥심 베이강

 

그리고 레노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또 다른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82세의 필리페 페탱 장군을 부총리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페탱은 곧 레노에게 등을 돌립니다. 

 

프랑스 부총리 필리페 페탱

 

맥심 베이강 장군도 다른 수가 없어 됭케르크까지 후퇴하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후퇴하는 것을 그냥 둡니다. 

 

이유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영국에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평화협정을 맺을 일말의 마음이라도 생겼기 때문에? 

 

해변을 가득 채운 40만 병력은 희망을 잃고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바다 넘어 영국뿐이었죠. 

 

됭케르크의 연합군

 

이제 이 40만 연합군의 목숨은 오롯이 독일에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몰고 왔을까요? 프랑스도 영국도 1차 세계 대전의 승리와 함께 

끝없는 독일의 도전에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준비가 무색하게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시련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역사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직도 일본에 대한 인식이

1960년~1990년까지의 일본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미국을 추격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졌었던 일본! 

제조업과 기초과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완성품 산업에서도 

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에서 인정하는 일제의 위력!

 

쏘니의 워크맨, 마이마이, 코끼리 밥솥, 카메라, 자동차 등등

'이거~ 일제야...' 라며 자랑했던 그 시절 말이다. 

사진출처: 오디오라이프
사진출처: MLBPARK

얼마 전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경제 성장률 비교에 대하여

OECD 발표 기준으로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일본의 수치는 정확히 발표된 것이 아니라 추측성 수치였다.

 

https://greatocean.tistory.com/9

 

대한민국 경제... 일본 제치나? 경제 성장률 '최고 성적'

대한민국이 OECD 주요국 2분기 경제 성장률 발표에서 -3.3%로 주요국 중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다시 말하면 COVID-19의 펜더믹과 자국우선주의 경제 노선으로 인해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경제적

greatocean.tistory.com

 

드디어 일본의 2분기 경제성장률이 발표됐다. 

 

결과는.... -27.8%

 

연률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

즉 2분기까지의 경제 성장률을 4분기까지 이어진다고

가정했을 때가 바로 -27.8% 인 것이다. 

 

이런 수치들이 발표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숫자의 기준을 어디 두느냐 인데 좀 더 정확히 알아보자면

 

일본의 2019년 2분기와 비교하면 경제 성장률은 -9.9% 라고 보는 것이 맞다.

대한민국이 작년 2019년 2분기 기준 경제 성장률이 -2.9%이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을 감안해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를 실로 심각하다 말할 수 있다. 

-9.9% 와 -2.9%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본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추가 재정을 투입했는데 GDP 대비 42%에 해당하는 금액을

두 차례에 걸쳐 투입을 했다. 

(대한민국은 GDP 대비 2.4% 투입했다.) 

 

2013년 일본에 아베 정권이 세워질 때 '경제 부흥'이라는 키워드가 세간의 이슈였고

'아베노믹스'를 통해 아베는 일본의 경제를 일으키려 했다.

 

아베노믹스는 쉽게 말해 정부가 돈을 풀어서 앤화 가치를 상승시켜 수출 경쟁력을 키우며

동시 탄탄한 내수 시장을 꾸준히 유지한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수 많은 경제 전문가와 저널리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의 경제가 추락하는 이유는 엔화의 문제가 아니라

혁신 하지 않는 일본의 문화에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지금 삼성의 갤럭시, 애플의 아이폰 처럼

일본의 뛰어난 그 무언가가 기억나는게 있는가?

자동차 분야도 이미 현대와 기아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게 옛날이다.

 

더 이상 일본에서 '혁신'을 찾아볼 수 조차 없다. 

 

심지어 일본은 단 한번도 일본 시민으로부터 발생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의 일본 경제를 추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베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제의 악화를 두려워해 오히려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최근 아베 건강 이상설이 나오고 있는 것도 뭐 이상하지도 않다.

오죽 걱정이 많겠는가? 

 

https://www.ytn.co.kr/_ln/0104_202008181511361397

 

'건강이상설' 아베 총리...'최장수' 기록 세우고 사임?

[앵커]아베 일본 총리가 어제 병원에서 장시간 건강검진을 ...

www.ytn.co.kr

 

2020년인 지금의 일본 경제는 2013년도로 다시 돌아간 모양새이다.

일본의 경제 추락이 역사적 관계 때문에 좀 속이 시원해 보일 수는 있지만

한국 입장에서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웃나라로 우린 어쩔 수 없이 일본과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2020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옛날처럼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협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7광구 에너지 문제, 역사 왜곡, WTO 유명희 사무총장 후보를 대놓고 지지하지 않는 등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든 것에 제동을 걸고 있는 일본이지만

 

우리는 이제 일본을 아우라고 생각하고

때론 강하게 때론 유연하게 여러 문제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171545001&code=970203

 

추락하는 일본 경제…2분기 성장률 사상 최악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의 2분기(4~6월) 경제성장률이 사상 최대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으...

news.khan.co.kr

 

20대 국회 정의당 비례대표 '류호정 의원'의 복장이 이슈가 되고 있다.

먼저 언론에서 다루고 있는 이번 이슈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내용은 너무 창피해서 제목만 정리를 하였다.

 

경향신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BJ 같다.” 류호정 의원 의상에 도넘은 비난

매일경제: 류호정 원피스 차림에 옵빠 한번 외쳐라”… 진중권 “미친 XX들”

한국경제: 분홍원피스로 국회 등장한 류호정…”소풍 왔냐”꼰대냐

조선비즈: “빨간 원피스등원 류호정에 與지지자 다방” “도우미성희롱 쏟아내

 

이번 류호정 의원의 국회 등원 시 입었던 옷을 가지고

각 당의 지지자 또는 네티즌 들의 반응을 옮겨놓은 것인데 제목이나 옮겨놓은 댓글이 자극적이기 이를 때없다.

내용을 보면 더 심한 것도 있는데 차마 옮기질 못하겠다.

 

복장이슈를 불러 일으켰던 류호정 의원 모습

의복은 옛날부터 그 옷을 입는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표현하는 일종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서울의 을지로 일대가 화이트 컬러의 대표 지역으로 상징되는 것도

사무직이 주로 흰색 와이셔츠로 대표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지날수록 '공적인 것'보다는 '사적인 것'이 중요해지다 보니

의복을 규정하는 다양한 관행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 결과가 노타이, 프리스타일데이, 반바지 입고 출근하기 등등

사회 전역에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고

이젠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대통령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디하나 나무랄 때 없는 깔끔한 복장이었지만 청바지라는 이유로 문제를 삼았다. 
청색 옷을 입고 국회에 등원하여 이슈가 되었던 복장

이렇듯 항상 규정이라는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줄만큼의 행태는 당연히 제한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젠 꼭 그래야 한다.' '이제껏 그래 왔었다.'라는 식의 표현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번 류호정 의원의 복장 문제는

단순히 공적인 자리에서의 복장 규정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류호정 의원은 젊은 여성이고 항상 젊은 여성들은 끊임없이 외모, 성적이미지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폄하되는 사례가 많지 않았는가?

 

한 방송에서 여기자가 주요 뉴스를 전파할 때 달리는 실시간 댓글도

주로 외모에 대한 평가다.

 

류호정 의원은 진보 정당으로 대표되고 있는 정의당에 비례대표로 20대 국회에 입성하였다.

최근 ‘비동의 강간죄’법안의 공동입법발의 등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정치인으로서

젊은 여성이 아닌 국민을 대표하는 젊은 신인 정치인으로서 바라봐주면 어떨까?

 

정의당 류호정 의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고 또는 논의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 꼰대들은 다 여기 있는 듯 답답할 때가 많다.

 

교실 학급회의 보다 못할 정도로 합의의 과정, 의견불일치, 항의, 반대, 거절의 행태 등이

저 사람들이 과연 지식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변화가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늘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삼권분립의 한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국회...

그 어떤 기관보다 변화의 바람이 거세고 빨라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이 20대 국회를 바라보며

21대 국회의원의 비율을 바꾸었다.

하지만 안심하면 안 될 것이다.

 

언제나 권력은 국민에게 있는 법이니까

 

류호정 의원은 더 당당하게 입법활동에 최선을 다해주시길 빈다.

 

유시민 의원이 백바지를 입고 국회에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OECD  주요국 2분기 경제 성장률 발표에서

-3.3%로 주요국 중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다시 말하면 COVID-19의 펜더믹과 자국우선주의 경제 노선으로 인해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고전했는데 대한민국은 -3.3%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라는 평가다.

 

OECD 모든 회원국의 경제성장률이 나온것은 아니고

주요국만 성장률이 발표되었는데 현재까지 회원국중 1위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OECD 경제 성장률 수치는 기간은 언제를 대비하여 비교하느냐고 중요한다. 

보통 전기대비와 전년동기대비가 있는데, 전년 동기 대비 즉 1년 전과 비교해야

COVID-19 펜더믹의 상황에서 얼마나 국가 경제가 잘 돌아갔는지 파악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전기대비로 하면 -3.3% 이고 전년 동기 대비로 하면 -2.9%로 발표가 되었다.

어떤 것으로 하나 현재까진 1위인 것이다. 

 

다른 나라를 좀 살펴보면 1년전 대비

스페인이 -22.1% 경제 성장률, 국가 경제의 5분의 1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미국은 -9.5%, 유럽은 유럽연합과 유로화를 쓰고 있는 유로존에 속한 나라들이 있는데

둘 다 약 -15% 정도 경제가 사라졌다. 

 

우리가 이렇게 경제 성장률을 잘 방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K 방역의 성공이라고 생각된다.

 

사진출처: KBS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악화일로에 있을 때도

셧다운 정책을 쓰지 않았고 바이러스 확산 방지와 추적을 통한 예방에 온 힘을 집중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지 않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재난지원금이다.

 

사진출처: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재난지원금 얘기하기 전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얘기하자면... 

 

여러분들은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받았나?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겠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카드사를 통해 돈이 충전되고

사용되는 방식을 썼을 것이다.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원금을 전달하는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전자정부의 힘이 아니었을까?

 

한국이 하는 거라면 뭐든지 방해를 하고 있는 일본은

아직 전자정부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원금 지급에만 엄청난 시간을 썼다고 한다. 

 

재난지원금에 대하여 초반 엄청나게 말이 많았다.

무상복지의 일환이다. 결국 복지를 늘리려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정책이다. 좌파 정책이다. 포퓰리즘 정책이다. 등등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070928001&code=910100

 

유승민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은 악성 포퓰리즘”

미래통합당 유승민 의원이 코로나19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news.khan.co.kr

우선 숫자로 보면 한국의 1분기 민간 소비지출이 전기대비 -3.2%이다. 

그런데 2분기에는 +0.65%로 반등하였다.

이것이 바로 재난지원금의 효과였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산업동향 발표에도 보면 소매판매는

6월에 플러스로 반전한 것이 확인된다.

전기대비도 플러스이고 전년대비도 플러스이다.

 

사진출처: 통계청

 

여기서 조금 더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우리가 재난지원금을 받아서 사용했을 때 제한이 있었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에서는 사용을 제한했고 주로 소매점 위주로 사용하게 했는데

이 부분이 작용하여 플러스 요인도 된 것이다.

같은 기간 대형마트와 백화점 판매는 줄었다. 

 

사진출처: 통계청

 

통상 국가에서 주요 지수를 발표할 때 특히 민간 소비율 같은 경우는

대부분 대형 마트나 백화점 등 대기업에서 나오는 수치를 통해 전체 평균을 끌어올리는 모양새인데 

 

이번에는 소형마트 및 시장 등 소상공인의 매출이 늘어나서

전체 수치가 끌어올려진 모양새라서

재난지원금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1차 재난지원금이 다 지급되었고 그 효과가 조금씩 소진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소상공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2차, 3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들리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https://www.fnnews.com/news/202007270840390598

 

김두관 "2차 재난지원금으로 GDP 추가 하락 막아야"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 [파이낸셜뉴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27일 "GDP(국내총생산) 추가 하락을 막을 2차 재난지원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

www.fnnews.com

 

그리고 최근 주목할 것이 일본의 2분기 경제 성장률인데

아직 수치가 나오진 않았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약 -20%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장기적인 경제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서

이미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쏟아부은 돈이 한화로 계산하면

약 2,661조, 지난해 GDP 대비 4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때 대한민국은 35조를 투입했다. GDP 대비 3%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일본은 이렇게 많은 재정을 투입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은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이 여행을 장려하고 이동을 제한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심지어 일본의 2분기 수출액도 -26%이다. 밖과 안이 모두 어려운 형국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국가신용평가기업인 피치, 무디스, SNP 등에서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자는 말이 있다.

기본 적으로 재정건전성이 나쁜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국가부채가 GDP 대비 -30% 정도로, 총 270% 육박할 것으로 예상)

 

이런 경제를 반영하듯 지난 3월 20일 달러 가치가 약세로 접어듦에 따른

각국의 통화가치가 동반 하락을 했는데 한국의 통화는 6% 절삭이 된 반면

일본의 통화는 4.5% 밖에 절삭이 되지 않았다. 이 말은 그만큼 일본 통화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경제가 어렵다는 일부 언론의 선동과 함께

한일 통화 스와프를 재계해야 한다고 말이 나왔는데

 

https://www.news1.kr/articles/?3883634

 

한국 외화조달 '비상등'…'한일 통화스와프 복원도 타진해야'

사실 앞에 겸손한 민영 종합 뉴스통신사 뉴스1

www.news1.kr

사실상 우리가 아쉬울 것이 하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8월 대법원 판결로 인하여 한국 내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으로

일본은 금융 보복을 하려 하는데...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본다.

 

일본이 여러 가지로 한국에 대하여 압박을 하고 있다.

수출 보복, G7에 한국 참여 반대, WTO 총장으로 유명희 지지하지 않음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뭐 하나 제동을 걸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일본의 경제적 상황 악화가 솔직히 두려울 정도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1950년 한반도의 전쟁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차분해져서 할 것이다. 그리고 냉철하게 전략을 짜고 조용한 승리를 거둬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정부에 지지를 보낸다. 

 

 

 

 

 

 

 

[1부-2. 히틀러의 유럽 침략...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

 

 

지난 1부-1에서는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독재정권 확립과

러시아와의 불가침 조약인 '독소조약'의 체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대포가 발사된

독일의 '단치히 자유시'의 공격에 대하여 알아봤습니다. 

 

https://greatocean.tistory.com/7

 

[6부작] 제2차 세계대전_1-1부 히틀러의 유럽 침략...

오늘부터 6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의 선언이나 편지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구성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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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단치히 자유시 공격>

 

1939년 9월 1일 오전 5시 35분 

제2차 세계대전의 첫번째 대포가 '단치히'에서 발사됩니다. 

 

단치히 자유시에서 행진하고 있는 독일 군인
독일 군인의 행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단치히 폴란드 시민

 

사실 '히틀러'는 프랑스와 영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양국 정부는 즉시 만나서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행위를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에 보냅니다. 

 

'히틀러'는 선언합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다. 단치히를 목표로 한 세계대전에 누가 감히 발을 담그려 하는가?"

 

이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1939년 9월 3일 이날 오전 11시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는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폴란드에서 독일 군인을 격려하고 있는 '히틀러'

 

'히틀러'는 믿기기 않았습니다. 이제 독일 장군들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했습니다.

2개 국가와의 전쟁이었죠.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습니다. 

 

히틀러는 나치독일의 국방군인 'Wehrmacht(베어마흐트)'를 폴란드로 파견하였습니다.

 

폴란드도 즉각 대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치 먼 옛날의 전쟁처럼

기마대가 독일 탱크를 맞이했고 이들은 결국 전멸합니다. 

독일 병사와 싸우고 있는 폴란드 기마대
전멸한 폴란드군

독일의 단치히 자유시의 공격으로 폴란드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의 독일과 폴란드는 신식 총기를 들고 있는 일본과, 활을 쏘고 있는 조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대응>

 

파리의 갸르드레스트 기차역
프랑스 징집병들을 배웅하고 있는 가족들

파리의 갸르드레스트 기차역입니다. 

이중 많은 이들은 25년 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서 기차를 탔습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3일 이 날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죠.

1914년 8월 프랑스 사람들은 총에 꽃을 달고 씩씩하게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3일엔 꽂은 없고 심지어 총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400만 명의 남자들이 징집되었습니다. 

 

걸어서 국경으로 향하는 프랑스 병사

이들은 걸어서 독일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장교들은 말을 타고 뒤따랐죠.

차량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단단한 고무타이어가 달린

이 구식 트럭을 몰았던 프랑스 병사 가스통 시랭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물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트럭 한대마다 2인당 소통 한정에 탄약 10개들이 상자 하나였고 상자는 뜯으면 안 됐다. 정말 딱했다. 필요한 물자만 있으면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보쉬들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보쉬는 1차 대전때 독일군을 낮춰 불렀던 격멸적인 호칭입니다. 

'베르드 그리'라고도 불렀죠. 프랑스 말로 회색 들판이란 뜻인데

독일 군복이 회색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군은 1939년 9월 7일에 공격합니다.

선전포고를 한지 나흘 후였죠.

 

이 공격은 폴란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의견을 보여준 것으로

자하르 지역까지 8km를 진군합니다.

 

프랑스국의 영화국이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들은 즐겁게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독일에 버려진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프랑스 군이 획득한 자전거 전리품

프랑스 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후퇴하여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음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자하르 공격은 거기서 멈췄고 최정의 게릴라들이 이어가는

일련의 소규모 전초전으로 전쟁은 변질되었습니다. 

 

이를 이끈 영웅 '조제프 다르낭'은 프랑스 최후 선군인이란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독일군에 가장 열렬히 협조하는 프랑스 군이 되고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처형됩니다. 

 

프랑스 군은 전쟁영웅도 많고 숫적으로도 우세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67 세의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합참의장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영국 합참의장 모리스 가믈랭

그는 이 전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가믈랭'은 1914년의 전쟁을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떡해서든 이 끔찍한 학살극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노선 뒤에서 2년 동안 안전하게 버티면서 

군대를 재 무장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노선은 전직 국방성 장관인 '앙드레 마지노'의 작품입니다. 

마지노선은 독일군을 영원히 막기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건축에만 거의 10년 가까이 걸렸고 무려 150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와

15만 톤의 강철이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 마지노선의 내부

수많은 포탑은 100km에 이르는 미로같이 복잡한 터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지노선의 길이는 720km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벨기에 국경까지 이어지죠.

마지노선은 아르덴 숲 아랫부분에서 끝납니다. 

 

마지노선과 아르덴 숲

프랑스 육군 사령부는 독일의 탱크가 아르덴 숲의

험한 지형을 넘어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죠.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북해까지 연장하지 않은 거은

중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우방이었던 

벨기에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독일을 비아냥 거렸던 지크프리트선위에 있는 빨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독일의 방어선 지그프리트

지그프리트 선은 마지노선에 맞서기 위해 히틀러가 세운 긴 방어선입니다. 

독일군은 공격하지 않고 계속 두 번째 전선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독일은 방어만 하고 절대 공격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도 프랑스 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미리 예방책을 강구합니다. 

그들은 '알자스'와 '로렌'지방 주민들을 동남쪽에 있는 '페리고르'와 '사량트'지방으로 피신시킵니다. 

 

 

<폐허가 된 폴란스의 '바르샤바'>

 

폭격 당하고 있는 '바르샤바'

 

히틀러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에도

정신적 충격을 주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바르샤바' 공습 뉴스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도 나왔고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중연설을 시작합니다.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서 '바르샤바' 공습 뉴스가 나오고 있는 장면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미국 국민에게 중립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중립을 지킨다 해도 사실에 주목할 권리는 있습니다. 
중립을 지킨다 해도 양심을 저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르샤바'의 공격으로 모든 대도시들은 공습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모든 문화재 건물들은 모래주머니에 보호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 배웠듯 모든 국민은 방독면이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말조차도 방목면을 써야 했죠. 

 

방독면을 쓰고 있는 말

한편 폴란드는 무자비하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히틀러'에게 동의했던 대로 '소련'은 '폴란드'의 동부 지방을 침공했습니다. 

독일과 소련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독일이 폴란드의 동쪽을 소련에게 넘겨준 이유는

추후 소련의 공격을 용이하기 위해 국경을 맞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죽어있는 폴란드 국민

폴란드 군은 독일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동쪽에선 소련군에게 항복했고요.

그러자 '스탈린'은 폴란드 포로 2만 명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독일과 소련에 항복한 폴란드 군인들

그는 합병할 나라의 최정예 병사들을 제거하고 싶었던 겁니다.  

무려 4천5백 명의 폴란드 장교들이 머리에 총을 맞고 처형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크렘린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망명정부의 수장인 '시코르스키' 수장을 만납니다. 

그는 실종된 폴란드 장교 명단을 가져왔죠.

 

실종된 폴란드 장군 명단을 가져온 폴란드 망명정부의 시코르스키

 

이 살인 행위에 당시 소련은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1992년 구소련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킨'은 폴란드 대통령인 '레흐바흐인사'에게

스탈린이 직접 서명한 처형 명령서의 원본을 전달했습니다. 

 

 

'히틀러'와 친위대 총통 '히믈러'는 이제 폴란드를 직접 돌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치 총독 '한스 프랑크'를 폴란드 점령 지역으로 보냈고 '프랑크'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폴란드 국민의 생과 사를 결정할 권한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독일 장군 '한스프랑크'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으려 했고

비인도적 범죄행위로 교수형이 처해집니다. 

 

독일군이 촬영한 집시 수용소에 억류된 집시 들의 모습입니다.

 

집시 수용소의 집시들

나치의 눈에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은 억지로 불임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치는 집시에 대한 사냥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수천만 명이 집단 수용소에 갇히게 됐죠

 

수용소의 집시들

이제 유태인들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나치는 300만 명의 폴란드 유태인을 잡아드렸습니다. 

 

유태인 표식을 하고 있는 폴란드의 유태인 여성

히틀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았습니다. 

전쟁에 유리하게 진행된다면 그는 이들을 동유럽으로 추방하거나 아예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확실하지 않을 때에만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은 광란의 집단 학살을 펼칠 예정이었습니다. 

바로 최종적 해결이죠.

 

유태인들은 인정을 받은 다음 노란 별 모양의 표지를 달고 강제 거주지인 '게토'로 들어갔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지역

이 불행한 유태인들 중 한명의 일기입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욕적인 폭력 장면을 보니 비통하기 짝이 없다.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거리에서 머리채를 잡힌체 끌려가는 폴란드 여성
길거리에서 나체로 몸을 피하고 있는 폴란드 여성

폴란드의 모든 주요 도시엔 게토 겸 감옥이 들어서서 독일계, 오스트리아계, 체코계 유태인을 수용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유태인들은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몰랐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굶줄임에 죽을지는...

대학살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죠.

 

바르샤바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게토 안에 억류된 유태인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국과 의도적으로 2차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 '히틀러'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충격 요법은 통했고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은 그저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이제 독일은 프랑스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프랑스의 참패'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예정입니다.

독일은 어떻게 몇 배에 달하는 프랑스 영국군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부터 6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의 선언이나 편지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구성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던 전쟁으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구성된 동맹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결이었고 승리는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6년간 끊임없이 생겨났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이 전쟁으로 5천만 명이 사망했다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나요?

이 수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헛된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요?   

 

 

[1부 - 1. '히틀러'의 유럽침략]

 

<1945년 베를린>

 

1945년 드디어 유럽은 나치의 공포 정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동에서는 연합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하고 있고 서에서는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도시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가 마지막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러시아 군대의 한 병사 '요제프 프라우토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한 명도 빠짐없이..."

-요제프 프라우토프-

러시아의 한 병사는 증오심에 가득 찬 광기 어린 전쟁을 마지막으로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독일 여성들의 호된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베를린의 한 여자'라는 책에선 1945년 독일 여성들에 대한 러시아군의 무자비한 성폭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의 독일여성

"그들이 나를 잡고 내동댕이 쳤다.
나는 머리를 계단에 대고 누웠고 군인들 중 하나는 계속 시계를 보았다. 
나머지 군인들은 내 속옷을 찢더니 그를 억지로 내 몸 위에 눕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몸을 노리는 러시아군이 내 머리를 노리는 미군보다 낫다고..."


'베를린의 한 여자' 한 대목

 

전쟁 막바지 연합군은 베를린 초토화를 위해 군인, 민간 지역 가리지 않고 융단 폭격을 가했습니다.

밤이 낮처럼 환해질 정도의 이런 무자비한 폭격은 며칠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베를린의 한 여자'라는 책에서 나온 독일 여성의 말은 연합군의 무차별적 폭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베를린 폭격 장면

 

1945년 연합군과 소련군은 베를린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군하고 있었고

증오와 복수로 가득 찬 무차별적인 폭력은 독일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원래 베를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대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1933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바로 한 사람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시민군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되기까지 정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총통이 되는 과정은 한 사람이 태어나 사회에서 출세하는 일련의 과정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관련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떻게 세계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을 선택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죠.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독일에 들어와

전쟁 범죄에 관해 색출 작업을 진행할 때 '히틀러'를 지지했던 수많은 독일인들을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한 가지 이야기만 들어도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1945년 젊은 독일인 소녀는 그의 할머니가 하는 행동에 이상함을 느낍니다. 

할머니는 땅속에 '나의 투쟁'이라는 '히틀러'의 저서를 묻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조심스레 손녀에게 말합니다.

 

"절대 여기를 다시 파서는 안된다. 그 누구에게도 이 책이 여기 있다고 말해선 안된다." 

 

'나의 투쟁'이란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물을 수 있는 시대였지만

그 할머니는 책을 땅에 묻고 불안해하면서도 절대 그 책을 태워버리거나 찢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금기시했지만 전쟁 후에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연합군에게 들키지 않으려 벽장에 숨기고, 산속에 버리고, 묻고 하였지만

반듯한 기름종이나 비닐, 보자기에 꽁꽁 싸매서 소중한 물건을 언젠가는 다시

내 자손에게 전해 주리라 라는 어떤 다짐을 하듯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소중히 다뤘던 것입니다. 

 

 

<격변의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까지 독일은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한 엄청난 배상금을 값아야 했고

연합국은 배상금의 명목으로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을 약탈했던 그 행태를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을 비판하며 이렇게 미래를 예언합니다.

 

"만약 고의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난 감히 예언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귀결 중에서...

 

전쟁의 패배는 독일 경제의 파탄을 가져왔습니다.

배상금의 명목으로 공장의 기계를 다 뜯어가는 시기였고

1918년 0.5 마르크로 빵 한 덩이를 살 수 있었다면

5년 뒤 1923년 100,000,000,000 (천억) 마르크를 가져야 만 빵 한 덩이를 살 수 있는

엄청난 인플레이션 속에 독일인들은 살아야 했습니다.

 

이 시대의 혼란 속 포퓰리스트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합법적인 정권을 잡고 몇 달 안에 독재정권을 확실하게 정착시킵니다. 

 

그는 이제 '퓨어러(Führer)' 즉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추종자들이 손을 들고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외칩니다. 

 

'아돌프 히틀러'

하지만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자 

히틀러는 상징적인 민족 자결주의 슬로건을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주입합니다. 

"우리 앞에 독일이 있다. 우리 안에서 독일이 움직이고 우리 뒤로 독일 전체가 뒤따른다."

'아돌프 히틀러 연설 중'

 

'히틀러'가 총통이 된 이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공익은 사익에 우선한다." 

'아돌프 히틀러'

도열해 있는 나치 당원 및 시민군들

'히틀러'는 독일인 들을 국유화하기 위해 수많은 조직을 탄생시킵니다.

어릴 때는 히틀러 청소년단 '유켄트'에 가입하게 하고 '독일소녀 동맹', '국가사회주의 여성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모든 독일인들이 나이별, 성별, 어떤 공적인 일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소속되게 합니다. 

 

독일 여성 단체의 행진

어떤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에 소속되어 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것입니다. 내편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계략> 

 

그런데 '히틀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자기 임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힙니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군인이었던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프랑스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의 군대와 영토 일부를 빼앗겼던 치욕을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모습

그다음은 '레벤스 라움(Lebebsraum)', 즉 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독일의 인구는 8천만 명으로 프랑스의 2배였습니다. 

 

병적인 반 유대주의자 '히틀러'는 유태인들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게르만계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확실히 부여해 주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아리아인 '우수 인종'인 '독일 인종'의 순수성과 우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역설했습니다. 

'히틀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리아인'은 금발에, 파란 눈,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의 '우수 인종'에 대한 것은 당연히 '열등 인종'이 생겨나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1933년 독일은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불임 수술로 출산을 제한했고

독일에서 약 3만 명에 달하는 로마니(집시)를 학살하고 수용소에 가두었으며

게이, 장애인, 정신병자 외 1차 대전 후에 독일 라인란트를 점령했던 연합군의 아프리카 식민지 군사와

독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인 약 500명의 아프리카계 독일 어린이도 희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최초의 집단 수용소인 '다하우(Dachau)'로 이송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그곳에 반나치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등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억류했습니다.

 

독일 군인이 유태인이 운영하는 가게 앞에 낙인 하는 모습 

'히틀러'의 생각으로 1차 대전과 독일의 패배, 독일의 심한 인플레이션, 실업의 원인이

유태인에게 있음으로 다음에 치러질 전쟁은 유태인에 대한 전쟁이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독일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나치 독일로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먼저 자기 고향부터 시작했죠. '안슐루스(Anschluss)' 즉 합병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과 똑같은 공포시대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렌츠 근교에 있는 가장 마흐트하우젠에 가장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그다음 희생국은 어디일까요? 인접한 체코슬로바키아?

스테텐 지역에 독일인들이 살고 있긴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 나라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서막>

 

독일 군인

전쟁의 기운이 모입니다. 

나치즘의 중심지인 뮌헨에서 11시간째 평화회의가 진행 중입니다. 

한쪽엔 점점 악독해지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있습니다. 

 

뮌헨의 평화회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로 전국에 파시즘을 주입했습니다.

 

맞은편은 1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지칠 때로 지친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보수주의자의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 극진 사회주의자인 프랑스 수상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뮌헨의 평화회의

 

이들은 결국 힘든 사안을 승인합니다. 

'체코 슬로바키아'의 '스테텐' 지방을 히틀러로 넘기고 그 대가로 

다른 유럽 국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죠.

 

하지만 히틀러의 약속을 믿어도 될까요? 

겨우 6개월 후 그는 총 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앞세우고 '체코 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에 입성합니다. 

'괴링'은 1차 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였고 나치당 창립멤버이며 이젠 공군 지휘관이죠. 

 

프라하에 입성한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이제 히틀러에겐 독일어권의 재결합이란 명분이 필요 없습니다. 

체코의 막강한 산업이 그를 뒷받침할 테니까요.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연합국이 이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히틀러'의 맞서는 인접 강대국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와는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상태 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공산주의 러시아와 그 위성 공화국들의 공식적인 이름입니다. 

 

소련의 여성 군인들

붉은 광장에서 대중을 다루는 것을 보면 '스탈린' 독재정권의 잔인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수백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인 '블라흐'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중국에 압박한 것도 바로 '스탈린'이었죠.

 

'이오시프 스탈린'

산업화와 강제적인 군사화를 통해서 소련은 주요 강대국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서구 열강들은 소련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이제 하나씩 이들을 제압하기로 합니다. 

1939년 여름 그는 '베르히데스가든'에서 외무장관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와 함께

 '차단 작전'을 준비합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로 하고 나치당원인 '리벤트로프'를 모스크바로 보내

최악의 적국(소련)과 역사적인 조약을 맺게 했습니다. 

 

스탈린 정권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독소조약에 서명하는 장면

'스탈린' 정권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Molotov)가 '독소 조약'을 체결하자

유럽대륙은 크게 당황합니다. 

 

이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 이유는 뭘까요?

소련은 '스탈린'이 시간을 끄는 사이 '히틀러'와 서구 열강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 일부를 장악하려는 '스탈린'은 

'히틀러'와 둘이서 유럽을 영원히 나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을 겁니다. 

 

1936년 미국 국회는 또다시 유럽 전쟁에 끌려들어 가지 않기 위해서 중립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나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히틀러'는

이 기회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겪어야 했던

최악의 굴욕을 설욕하려 합니다.

 

독일을 둘로 나뉘게 했던 단치히 자유시

바로 '단치히' 자유시이죠.

 

1919년 독일 영토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폴란드로 들어가기 위해서죠.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과 '단치히' 수복을 결정했습니다. 

 

때는 1939년 9월 1일 오전 5시 35분 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대포가 단치히에서 발사됩니다. 

 

단치히를 공격하고 있는 독일 전함

 

이제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1939년 9월 1일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움직이기 시작하고 소련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쟁이 흘러 갈까요?

 

다음편은 단치히 수복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던킨도너츠에서도 드디어 이벤트를 시작했다.

스타벅스의 '드링크웨어 마케팅'의 영향일까?

 

참고로 스타벅스는 그동안 무수히 많은 마케팅을 진행했는데

그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첫 번째.. 스타벅스는 매체 광고를 하지 않는다. 

광고에 큰 비용을 투자하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매장이나 사람에게 투자하여

소비자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브랜드를 홍보하는 '체험마케팅(Experience Marketing)'을 진행한다.

다시말해 소비자들이 자주 접하는 곳에 매장을 열고 매장 자체를 브랜드 광고판처럼 노출해서 입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스타벅스는 이국적인 인테리어, 원목가구, 친절한 서비스, 재즈음악 등

공통적으로 매장마다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두 번째... 스타벅스 드링크웨어 마케팅(Drinkware Marketing)

스타벅스는 음료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매장 전체에 드링크와 관련이 되어있는

상품에 스타벅스 로고를 입혀 판매함으로써 브랜드를 홍보하고 있다.

각 매장 한켠에 상품 전시를 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드링크웨어 마케팅의 한 축이다.

그리고 스타벅스 다이어리, 스타벅스 레디백 등 한시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 또한

드링크웨어 마케팅의 일종이다.

 

스타벅스를 시작으로 많은 커피 브랜드 들이 위와 같은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는데 드디어 던킨도 시작을 했다.

소비자에게는 특별혜택이 주어지니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스타벅스 레디백처럼

커피를 사서 커피는 버리고 상품만 가져가는 그런 일은 없어야겠다.

 

던킨이 진행하고 있는 이번 상품은 폴딩 박스!!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캠핑족이 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폴딩박스 선택은 신의 한 수가 아닌가?

심지어 폴딩 박스인데 예쁘다.   

 

사진출처: 던킨 홈페이지

 

사진출처: 던킨 홈페이지

예약 기간 : 7월 27일(월) ~ 7월 30일(목)
픽업 기간 : 7월 31일(월) ~ 8월 3일(월)
예약방법 : 예약 기간 내 해피 앱에서 예약하기 , 픽업 시간에 픽업하기

출처: https://ccanips.tistory.com/370 [Ccanip's Jatory]

 

해피 앱으로 주문하고 선택 매장에서 픽업을 하면 된다. 

오늘부터 오픈인데 오픈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10시 정도 되지 않을까?

 

던킨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프로모션 이벤트!!

스타벅스처럼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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