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독일이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하고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련을 공격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을 다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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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 제2차 세계대전_3부 유태인의 대학살

지난 시간은 히틀러의 계략으로 무너져간 프랑스와 프랑스 비시 정부의 탄생 그리고 끝까지 항전하며 결사의 의지를 다졌던 영국의 상황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결연히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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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럽의 모든 나라, 도시는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영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갔죠.

 

이제 독일은 소련을 공격합니다.

독일과 소련은 처음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때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장기적인 소련 공격 계획을 세웠고

그 어떤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공격합니다.

 

은밀히 러시아 영토로 진입하는 독일군

1941년 6월 22일 이었습니다.

그들 뒤로는 독일군 153개 사단을 비롯해

핀라드, 로마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사단도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파시스트 사단도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300만 대군과 함께 투입된 60만 대의 트럭 중 많은 수가 프랑스 베를리아와 르노 등에서 만들어집니다.

3,000대 이상의 주포와 7,000문이 넘는 대포, 3000대의 항공기...

24시간 이내에 1,500대의 소련 항공기가 이륙도 하지 못하고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되는 소련 항공기

 

독일의 기습공격으로 소련 공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독일의 공격은 3천 킬로미터에 걸쳐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독일의 소련 공격라인

북쪽 지역의 공격 목표는 레닌그라드입니다. 레닌그라드는 상징적인 목표물입니다.

레닌의 도시이며 러시아 혁명의 요람으로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중앙 진격의 공격 목표는 정치적인 목표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였고

남쪽 지역의 목표는 경제적인 가치가 높은 키예프와 우크라이나였죠.

 

북부의 발트 삼국에서는 때때로 독일은 해방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겪은 그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압박을 가했던

무자비한 소련의 비밀경찰보다는 나았다는 것입니다.

 

퇴각하는 소련군은 발트 삼국에 있던 반공주의자들을 처형했습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유태인들이 공산주의자 등과 공모했다고 주장했죠.

유태인들은 시신을 옮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발트 삼국 전역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대학살이 계획되기 시작했고

독일은 그들을 부추기며 절대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신을 태우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었죠.

 

 

중부전선에서는 전격전의 창시자의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일련의 방어시설의 배치한

스탈린 전선에 가로막혀 고전했습니다.

 

 

구데리안 장군은 기갑, 척탄병을 투입해 뚫고 나가야 했습니다.

 

 

구데리안 장군은 계속 전진했습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요소가 그의 정예 차량화 부대의 전진을 방해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독일 병사가 말했습니다.

 

장갑차를 타고 전진하면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이곳은 러시아였다. 도로나 아스팔트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끔찍하다. 
누런색과 붉은색의 끈적한 먼지가 눈이며 코, 입속 등 모든 곳으로 파고든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독일 병사들은 하루에 50Km씩 이동했습니다.

이들은 곧 러시아가 얼마나 광활한 나라인지 깨달을 참이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도 단 하나의 마을을 볼 수 없는 곳이 러시아였습니다.

 

진격할수록 물자와 연료, 탄약을 실은 지원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죠.

독일군이 극복해야 할 상황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타입의 러시아제 타입의 탱크 등장에 독일군은 당황했습니다.

 

T-34는 30톤이 달아는 거대한 탱크로 막강한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고

광폭의 궤도로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미비한 통신장치는 약점이었죠.

이 거대한 무기를 대적할 수 있는 독일의 무기는 88mm 대전차포뿐이었습니다.

 

무기와 군대 등 전체적인 군사력은 독일이 더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이 2만이라고 칭한 러시아군은 마지막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했죠.

 

러시아군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독일군의 사상자도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지만 3개의 목표지점까지 계속해서 전진해 나갑니다.

 

히틀러는 정치지도자의 인민위원들과

부대에서 장교들을 감독하고 병사들을 감시하던 역할을 하던 공산당원들을

모두 즉각 처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구데리안은 이런 범죄적 명령에 반대했죠. 그러나 제4 기갑 군의 사령관이

베프너 장군은 말했습니다.

 

이 전쟁은 초유의 무자비함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볼셰비키에서 베풀 자비는 없다.

베프너 장군

 

러시아군은 점차 고갈되어 가는 무기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4명당 소총이 1자루 인적도 많았습니다. 

 

러시아 군은 전선 전역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망은 암울했습니다. 

 

1941년 7월 3일 스탈린은 강한 불우 지아 억양으로

한 번도 발음해 본 적이 없는 말을 합니다. 

그는 러시안인들을 나의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르면서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히틀러의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적은 무자비 하며 냉혹합니다. 이 나라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이 가장 암울한 시기에 내가 감히 공언합니다.
독일, 파시스트 군대가 정말 무적일까?

나폴레옹의 군대도 무적이라고 여겨졌지만
결국 그들은 패배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 연설을 듣고 있는 러시아인

 

스탈린은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군수공장들을 우랄산맥 지대로 이동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농부와 소작인들에게도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모두 떠나야 한다. 모든 것을 태우고 떠나라.

이것이 바로 스탈린의 초토화 정책입니다.

 

 

독일 장교들은 나폴레옹의 전례를 잊지 않았습니다.

1812년 러시아는 들판과 도시를 태우는 전략으로 

나폴레옹의 대 육군을 패배시켰고

베르지나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대량 학살 했습니다. 

 

 

1941년 7월 초 독일군 역시 중부전선에서 베르지나 강에 도착했지만

멈추지 않고 독일군을 계속 전진합니다.

  

저항은 점점 더 거세졌습니다.

강 건너편에서는 달갑지 않은 복병이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죠.

 

러시아군은 새로운 무기인 로켓탄 발사기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독특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나서 스탈린의 오르간 또는 카투사라고 불리는 신무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독일군을 막지 못합니다.

7월 중순에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인 스몰린스크에 도달합니다.

 

스몰린스크 전투는 3주간 지속됩니다.

독일군은 확성기로 항복을 하라고 전하지만 러시아군은 끝까지 항전합니다.

 

포로의 수는 극히 적었고 일부 생존자들은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어 반군이 됐습니다.

많은 소작농과 농부들이 반군에 합류해 전투 훈련을 받았습니다.

 

 

러시아군의 목숨을 건 항전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늦어졌습니다.

히틀러는 독일군 총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 원수와 상의합니다.

 

바르바르샤 작전은 지연되기 시작했고

일부 장군들은 3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구데리안 장군이 말했습니다.

이제 모스크바가 350km 밖에 남았습니다.

진격은 늦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전시경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네

그들이 예전처럼 기아 작전으로 우리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밀이 필요한 시점이네.

 

 

히틀러는 구데리안 장군에게 모스크바는 상징적 목표물이니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군대를 남쪽 키예프 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원래 남쪽으로 진격하던 독일군과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이 키예프를 포위하면서

이 작전은 사상 최대의 포위 작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무려 60만 명의 러시아군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히믈러가 수용로를 둘러봅니다.

독일군들에겐 포로들에게 먹일 식량 공급 계획 따윈 없었습니다.

히믈러는 그가 열등 인간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냉담한 결정을 합니다.

 

이들을 그냥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폰카게넨 중위는 얘기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생활은 안락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구할 수 있었다.
달걀, 과일, 우유, 버터, 와인

흑해 유역에서 생산되는 뛰어난 적포도주였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기쁘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자들은 빵과 우유를 가지고 다가왔다.

우리를 해방군으로 여겼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스탈린을 증오할 충분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30년대 초 스탈린은 대대적인 기아 작전을 전개해

거의 7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일부 반유대주의자들이 포함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독일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나치 독일에 동조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이런 동맥을 얻은 기회를 망쳐버리고 맙니다.

독일의 이인자라고 불렸던 괴링원수가 우크라이나를 시찰합니다.

 

쓸모 없는 자는 먹이지 마라.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는 죽어야 한다.
일하는 자들은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이다.

-헤르만 괴링-

괴링은 우크라이나를 노예화하는 정책을 실현하고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던 것입니다.

 

러시아 공격을 위한 바르바 르샤 작전은 지연되고 있었고

모스크바를 향하던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전형적인 기아 작전을 회피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키예프,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여 60만 명의 러시아군을 사로잡았고

이들을 굶겨 죽였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칭하면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편에 섰지만

헤르만 괴링은 우크라이나 노예화 작전을 진행하면 유태인들을 말살하려 합니다.

 

동부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이런 유태인 말살 작전이 수립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시점입니다.

 

앞으로 소련을 어떤 운명에 놓일까요?

 

다음 편은 러시아군의 반격과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대해 다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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