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 프랑스의 참패 그리고 유린... 패배한 나라의 고통]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10분 독일은 드디어 프랑스 침공을 위해서 유럽의 서쪽으로 향합니다.

2년간 전쟁의 징후가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곧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고 2년간 준비는 충분했습니다.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사기충전, 승리를 위해서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는 달랐습니다.

 

활을 쏘는것과 총을 쏘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전쟁에서 패하고 프랑스 북부의 항구 '됭케르크'까지 밀려갑니다.

 

지난 시간 왜 프랑스군이 대패하며 '됭케르크'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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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 제2차 세계대전_2부 프랑스의 참패

[2부-1. 독일군의 신들린 전투와 아돌프 히틀러의 전략] 지난 시간에는 독일과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독일의 히틀러가 어떻게 유럽의 다양한 지역을 폭격하고 유린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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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이른바 '낫 베기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1940년 5월 28일 프랑스-연합군은 모두 포위되었습니다. 

 

벨기에 왕은 군대를 이끌고 독일에 항복을 하였습니다. 

영국군은 해안 쪽으로 일단 퇴각을 했죠.

 

독일의 낫베기 작전으로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까지 밀려나게 된 연합군

 

프랑스의 1차 세계대전의 영웅 '맥심 베이강' 장군이 새롭게 임명되지만

'베이강' 장군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해안 쪽으로 퇴각을 하게 되죠. 

 

됭케르크의 프랑스-영국 연합군

 

윈스턴 처칠

1940년 5월 29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질'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선박을 동원해 구조를 지시하였습니다. 

 

'됭케르크' 외곽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릅니다.

그리고 독일은 '됭케르크'의 연합군에 진격하지 않으면서 '괴링'의 스투카만 적당히 투입합니다. 

 

됭케르크 외곽의 프랑스군
독일의 폭격기
독일의 폭격을 받고 있는 영국 선박

'됭케르크'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극적이었습니다.

40만 병력이 무력하게 해변에 누워 그들을 구출해줄 선박만 기다리고 있는 그때는

독일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을 그냥 영국으로 보내줍니다. 

 

이로써 영국국 21만 8천 명과 프랑스군 12만 명의 철수작전은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영국군은 구조되었지만 모두 누더기 상태였습니다. 

 

영국 호버 해안에서 선박을 내리고 있는 영국군
군화도 없이 선박에서 내리고 있는 군인

프랑스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는 영국 여인

영국군은 재무장 센터로 다시 보내졌습니다.

모든 영국 국민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흥분을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전쟁은 철수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그러나 1940년 6월 '됭케르크 철수 작전' 이후에 '됭케르크 정신'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영국인들은 전쟁의 무자비함과 적국 나치 독일의 파괴력을 실감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은 사라지고 전국의 무장화를 위해서 매진하기 시작했죠. 

 

1940년 6월 4일 국내 패배주의자와도 싸움을 해야 했던 '처질'이 입을 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어조였습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상륙지점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겁니다.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윈스턴 처질-

 

1940년 6월 4일 독일은 '됭케르크'를 점령합니다.

엄청난 전리품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선전 부대에서 이것을 그대로 촬영했습니다. 

 

됭케르크를 점령한 독일군

 

연합군이 두고간 차량
해안에 버려진 영국군의 포
됭케르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독일 병사
해변에서 프랑스의 축음기로 노래를 듣고 있는 독일군

이후 공격은 계속 이어졌고 프랑스는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레노'총리와 당시 국방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은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프랑스 샤를 드골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연설합니다.

 

'전쟁 포고문이 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에게 방금 전달되었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인들에게 연설하는 '무솔리니'

'무솔리니'는 '론 계곡'과 '마르세유'를 비롯해 '포르시카'와 '튀니지'의 무장해제 등을

자기 몫의 전리품으로 얻을 욕심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배신당했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 독일군.
프랑스 도시에 있는 독일 전차

프랑스 '파리'는 무방비 도시를 선언합니다.

즉 '바르샤바'나 '로테르담'처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그냥 넘겨주겠다는 겁니다.

 

이 시기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졌습니다. 독일군이 다가왔습니다.

1870년 프러시아 군처럼 죽이고 강간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피난 하고 있는 프랑스 시민
파닌길에 오른 파리 시민

프랑스 전체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대탈출이었습니다.

수백만명의 프랑스인들이 마지막 보루인 '누아르'로 몰려들었습니다. 

 

독일군은 계속 전진하고 있고 프랑스 하늘에선 언제든 독일의 '스투카'를 볼 수 있었죠.

 

피난객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는 독일의 스투카
폭격을 피하고 있는 프랑스 시민
폭격을 피하고 있는 프랑스 가족

1940년 6월 14일 새벽, 드디어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였습니다.

 

파리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독일군

독일군이 가장 먼저 한일은 프랑스 정부에서 미처 파기하지 못한 비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파이들, 유태인들,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명단과

 

1919년 독일의 치욕을 안겨줬던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이

즉시 히틀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940년 6월 15일 프랑스 시민의 민족 대탈출은 멈춰 섰습니다.

모든 다리는 폭파되었고 이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갈곳이 없는 프랑스인들

 

이제 남은 희망은 싸움이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보르도'의 '패탱' 역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항복하는 프랑스군

독일은 사정없이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한때는 막강한 군대력을 보유한 프랑스는 이제 엉망이 되었습니다. 

 

 

무려 185만 명의 프랑스 군사들이 전쟁 포로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장교 3만 6천 명, 장군 176명도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
전쟁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포로들 중엔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들도 많았습니다. 

독일의 영화제작자가 그들을 촬영했습니다. 독일의 선전 뉴스는 이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계속 보여줍니다.

 

프랑스 식민지의 병사
프랑스 식민지 병사

이들을 보여주면서 선전 매체는 이렇게 썼습니다. 

 

'연합군은 말합니다.
우리의 '중세기적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이죠. 
그 '문명의 수호자' 들을 보십이오!!'

-독일 선전매체-

 

이제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먼저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총리 '폴 레노'는 책략에 밀려서 강제 사임을 합니다. 

그의 후임으로 '필리페 페탱'이 프랑스 정부의 수장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6월 17일 페탱 총리는 휴전을 하겠다고 연설을 합니다.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한 건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 수상 '필리페 패탱-

 

독일은 이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듣고 환호하였고

프랑스 '샤를 드 골' 장군은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새로이 연설합니다. 

 

'프랑스의 명예는 우리의 동맹군들과 함께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1940년 6월 18일 '샤를 드골'-

 

1940년 6월 22일 독일의 '히틀러'는 파리에 도착했고

1919년 독일에 치욕을 되갚아줄 상황을 연출합니다. 

 

독일의 패배를 확정 지었던

1918년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던 열차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의 복수는 완벽했습니다.  

 

프랑스의 '헌징거' 장군이 프랑스의 사절단을 대표합니다. 

 

독일의 통역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통렬한 비 난문을 읽었고

'히틀러'는 한마디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프랑스 대표단에게 휴전 조건이 전달되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에 도피해온 반나치주의 독일인들을 넘겨주라는 조건이었습니다. 

 

'헌징거'는 협상해 보려 하지만 독일은 거절합니다. 

 

'헌징거'는 보르도의 프랑스 정부에 전화를 걸었고 독일의 비밀 경찰이 이 통화 내용을 녹음했습니다. 

 

 - '헌징거 입니다.'
- '말하게...'

- '끝났습니다.'
- '끝났다고?'
- '네 장군'

- '잘 처리해 줘서 고맙네'
- '네 저를 이해하시죠?'
- '...'
- '그럼 이해하지'

 

열차안에서 협상하고 있는 헌징거

 

프랑스는 이제 완전히 독일로 넘어갑니다.

프랑스의 모든 것이 바뀌어 갑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물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모든 것이 전리품이 됩니다. 

 

전차 2천대, 포 5천 문, 소총 30 만정과 400만 발의 달하는 총알이 그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육군 보급 창고에서 수십만 벌의 군인 내복 더미가 발견됩니다.

 

이 내복은 훗날 독일 군들에게 지급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모든 공장, 항구, 정부 그리고 개인 재산까지 모두가 전리품이었습니다.

 

프랑스 육군 보급대의 내복

 

전쟁을 선포한 것은 프랑스였으니 그 대가로 하루에 1억 달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헌징거 장군은 프랑스의 패배 조건을 실행하는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갑니다.

독일은 최소한의 군대를 남겨놓기 위해서 일부 프랑스가 부분적인 주권을 유지하게 합니다.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 지역은 프랑스의 대부분의 항구를 포함하고 있고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쪽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며

 

비 점령지역은 자유지역으로 프랑스 정부가 담당하며 새로운 수도는 비시로 결정 납니다.

그래서 '비시 정부'가 생겨나게 됩니다. 

 

'패탱' 수상이 프랑스의 작은 휴양지 비시로 들어서서 정부 회의를 진행하지만 분위기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의 '비시 정부'는 여러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국에 가담하지 않고 항구에 비무장 상태로 계속 정박하고 있으라는 것이 히틀러의 요구였습니다.

 

반대로 '처칠'은 선박들이 독일의 손아귀로 들어갈 것을 우려해 영국 해군의 명령의 내려 제압하려 합니다. 

1940년 7월 3일 영국 해군은 프랑스 최대 해군 기지인 하나인 알제리의 '메르스 엘케 비르'로 향합니다.

 

 

 

처칠은 모험을 하지 않았고 프랑스 함대에 최후통첩을 합니다.

영국에 편에 서서 스스로 배를 침몰시키든

카리브해까지 호위를 받고 가서 무장해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영국은 폭격을 개시했습니다.

프랑스 전함 2척이 심하게 부서졌고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전사했습니다. 

 

영국 국민과 전 세계, 다른 누구보다도 미국을 향해 자신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처칠'은 독일군의 영국 상륙을 도와줄 수 있는 옛 동맥 국의 함대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비시 정부'는 영국과의 외교 단절을 선언합니다. 

 

독일은 프랑스 북부의 '건지 섬'과 '저지 섬'을 점령합니다.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죠. 

 

 

1940년 7월 영국은 사소해 보이는 부분까지 준비하며 독일의 침공에 대비합니다.

가장 다급한 준비는 아이들을 안전한 시골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죠. 

 

그리고 여자들도 전쟁 준비를 합니다. 

여자들도 독일 낙하산 부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표지판을 지우고 있는 영국인
아이와 작별하는 엄마
총기를 배우고 있는 영국 여자

남자들은 1차 대전의 베테랑들까지 지역 방위대에 자원합니다.

됭케르크에서 구조해온 군대가 재정비하는 동안 자원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소총과 대공포들이 공급되었고 모두가 전력을 가다듬었습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이 연설합니다. 

 

'영국의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따라서 굳건히 사명을 완수하며 잘 견뎌 낸다면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천년 더 지속된 후에도 후손들은 말할 것입니다. 

지금이 가장 찬란한 시대였다고...'

-윈스턴 처칠-

 

처칠의 주요 무기는 롤스로이스 엔진을 장착한 항공기 '스핏 파이어'와 항공력이었는데

당시 '스핏파이어'는 세계 최고의 전투기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독일보다 전자전에 앞서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레이다를 사용했죠.

레이더는 항공기를 감지하고 파일럿들에게 적의 위치를 전송했죠.

 

영국의 '스핏 파이어'

 

대영제국 곳곳에서 파일럿들이 모여들었고 독일에 패배한 국가들의 파일럿도 영국에서 자원했죠.

폴란드,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였습니다.

드골 장군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도 합류했습니다. 

 

영국 군대 자원자 중에서는 옥스퍼드, 캠브릿지 대학생들도 많았는데

리처드 힐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장발의 아이들로 불렸습니다. 환멸에 빠진 응석 받이였죠.
언론에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칭했습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영웅적인 행동을 요구하기보다는
우리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주었죠.
우리 제멋대로 일진 모르지만 히틀러에 물든 젊은이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리처드 힐러리'-

 

 

독일 파일럿들은 모두 히틀러의 유겐트 훈련단에서 복수를 벼르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무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수장 '헤르만 괴링'은 인기가 높았습니다. 

 

'헤르만 괴링'

사치를 즐겼던 괴링은 파리의 호텔에 묵는 경우가 많았고 룩셈부르크 궁전을 공군 기지로 삼았습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며칠 만에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을 물리치고 독일의 상륙에 일조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독일 공군은 프랑스의 모든 비행장과 설비, 장비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실력이 좋았습니다.

 

점령지 프랑스 비행장에서 이륙한 독일 전투기들은

영국 해협의 호위 선단을 폭격하고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폭격했습니다.

 

폭격받고 있는 호위 선단
영국 남부의 비행장 폭격 장면

독일은 영국 전투기 500대를 격추시켰지만 독일 전투기 1,000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영국 파일럿들은 전력을 쏟아부으며 버텨 냅니다. 

 

영국 '스핏 파이어'

 

히틀러는 영국 침략 계획을 보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첫 실패였죠. 그는 이제 야간 폭격에 좀 더 의지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도시들이 파괴되면 영국은 항복할 것이다. '

'히틀러'

 

독일의 폭격기들이 매일 영국의 도시를 폭격했습니다. 

전격 작전이었죠.

 

폭격받은 영국
독일 폭격으로 사망한 영국인

영국 사람들은 존경스러울 만큼 잘 버텨 냅니다.

집집마다 마당에 방공호를 팠고, 런던 시민들은 지하철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습니다.

 

방공호를 파고 있는 영국인
폭격을 피해 지하철에서 잠자는 영국인

그들은 자신감이나 유머감각을 절대 잃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프랑스에 말합니다. 

 

'히틀러가 잿더미로 만들겠다던 이 곳 런던에서 
우리 국민은 꿋꿋이 버티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

 

히틀러는 답답했습니다.

그는 처칠을 유태인에 사로잡힌 반미국인 주정뱅이라고 하며

이후로 그는 좌절할 때마다 유태인들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바르샤바 '게토'

 

3m가 높은 벽이 세워져 50만 유태인을 가둬놓았습니다.

남자, 여자, 아이들, 노인들 모두가 여기 가둬졌고 이들은 몰랐습니다. 

끔찍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모두가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줄은...

 

 

 

독일은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했고 이제 영국과의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이미 점령한 나라...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등 모든 지역에서 고난이 시작됩니다.

 

다음 회는 영국이 어떻게 독일에 대응하고 또 독일은 어떤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 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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