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6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의 선언이나 편지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구성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던 전쟁으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구성된 동맹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결이었고 승리는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6년간 끊임없이 생겨났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이 전쟁으로 5천만 명이 사망했다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나요?

이 수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헛된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요?   

 

 

[1부 - 1. '히틀러'의 유럽침략]

 

<1945년 베를린>

 

1945년 드디어 유럽은 나치의 공포 정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동에서는 연합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하고 있고 서에서는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도시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가 마지막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러시아 군대의 한 병사 '요제프 프라우토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오가 아주 깊어졌다. 전쟁을 끝내고 싶다.
우리를 죽이려 한 저들을 전멸시키자. 
저들을 없애자. 한 명도 빠짐없이..."

-요제프 프라우토프-

러시아의 한 병사는 증오심에 가득 찬 광기 어린 전쟁을 마지막으로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독일 여성들의 호된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베를린의 한 여자'라는 책에선 1945년 독일 여성들에 대한 러시아군의 무자비한 성폭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의 독일여성

"그들이 나를 잡고 내동댕이 쳤다.
나는 머리를 계단에 대고 누웠고 군인들 중 하나는 계속 시계를 보았다. 
나머지 군인들은 내 속옷을 찢더니 그를 억지로 내 몸 위에 눕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몸을 노리는 러시아군이 내 머리를 노리는 미군보다 낫다고..."


'베를린의 한 여자' 한 대목

 

전쟁 막바지 연합군은 베를린 초토화를 위해 군인, 민간 지역 가리지 않고 융단 폭격을 가했습니다.

밤이 낮처럼 환해질 정도의 이런 무자비한 폭격은 며칠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베를린의 한 여자'라는 책에서 나온 독일 여성의 말은 연합군의 무차별적 폭격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베를린 폭격 장면

 

1945년 연합군과 소련군은 베를린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진군하고 있었고

증오와 복수로 가득 찬 무차별적인 폭력은 독일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원래 베를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대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1933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바로 한 사람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시민군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되기까지 정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총통이 되는 과정은 한 사람이 태어나 사회에서 출세하는 일련의 과정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관련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떻게 세계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을 선택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죠.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독일에 들어와

전쟁 범죄에 관해 색출 작업을 진행할 때 '히틀러'를 지지했던 수많은 독일인들을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한 가지 이야기만 들어도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1945년 젊은 독일인 소녀는 그의 할머니가 하는 행동에 이상함을 느낍니다. 

할머니는 땅속에 '나의 투쟁'이라는 '히틀러'의 저서를 묻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조심스레 손녀에게 말합니다.

 

"절대 여기를 다시 파서는 안된다. 그 누구에게도 이 책이 여기 있다고 말해선 안된다." 

 

'나의 투쟁'이란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물을 수 있는 시대였지만

그 할머니는 책을 땅에 묻고 불안해하면서도 절대 그 책을 태워버리거나 찢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금기시했지만 전쟁 후에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연합군에게 들키지 않으려 벽장에 숨기고, 산속에 버리고, 묻고 하였지만

반듯한 기름종이나 비닐, 보자기에 꽁꽁 싸매서 소중한 물건을 언젠가는 다시

내 자손에게 전해 주리라 라는 어떤 다짐을 하듯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소중히 다뤘던 것입니다. 

 

 

<격변의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까지 독일은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한 엄청난 배상금을 값아야 했고

연합국은 배상금의 명목으로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을 약탈했던 그 행태를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을 비판하며 이렇게 미래를 예언합니다.

 

"만약 고의로 중부 유럽을 빈곤에 빠뜨리려 한다면 복수는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난 감히 예언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귀결 중에서...

 

전쟁의 패배는 독일 경제의 파탄을 가져왔습니다.

배상금의 명목으로 공장의 기계를 다 뜯어가는 시기였고

1918년 0.5 마르크로 빵 한 덩이를 살 수 있었다면

5년 뒤 1923년 100,000,000,000 (천억) 마르크를 가져야 만 빵 한 덩이를 살 수 있는

엄청난 인플레이션 속에 독일인들은 살아야 했습니다.

 

이 시대의 혼란 속 포퓰리스트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합법적인 정권을 잡고 몇 달 안에 독재정권을 확실하게 정착시킵니다. 

 

그는 이제 '퓨어러(Führer)' 즉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추종자들이 손을 들고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외칩니다. 

 

'아돌프 히틀러'

하지만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자 

히틀러는 상징적인 민족 자결주의 슬로건을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주입합니다. 

"우리 앞에 독일이 있다. 우리 안에서 독일이 움직이고 우리 뒤로 독일 전체가 뒤따른다."

'아돌프 히틀러 연설 중'

 

'히틀러'가 총통이 된 이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공익은 사익에 우선한다." 

'아돌프 히틀러'

도열해 있는 나치 당원 및 시민군들

'히틀러'는 독일인 들을 국유화하기 위해 수많은 조직을 탄생시킵니다.

어릴 때는 히틀러 청소년단 '유켄트'에 가입하게 하고 '독일소녀 동맹', '국가사회주의 여성동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모든 독일인들이 나이별, 성별, 어떤 공적인 일을 위해 조직된 단체에 소속되게 합니다. 

 

독일 여성 단체의 행진

어떤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에 소속되어 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것입니다. 내편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의 계략> 

 

그런데 '히틀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자기 임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힙니다. 

1차 대전에서 패배한 군인이었던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프랑스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의 군대와 영토 일부를 빼앗겼던 치욕을 갚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 모습

그다음은 '레벤스 라움(Lebebsraum)', 즉 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독일의 인구는 8천만 명으로 프랑스의 2배였습니다. 

 

병적인 반 유대주의자 '히틀러'는 유태인들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게르만계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확실히 부여해 주는 임무도 맡았습니다. 

 

아리아인 '우수 인종'인 '독일 인종'의 순수성과 우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역설했습니다. 

'히틀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리아인'은 금발에, 파란 눈,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의 '우수 인종'에 대한 것은 당연히 '열등 인종'이 생겨나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1933년 독일은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불임 수술로 출산을 제한했고

독일에서 약 3만 명에 달하는 로마니(집시)를 학살하고 수용소에 가두었으며

게이, 장애인, 정신병자 외 1차 대전 후에 독일 라인란트를 점령했던 연합군의 아프리카 식민지 군사와

독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인 약 500명의 아프리카계 독일 어린이도 희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최초의 집단 수용소인 '다하우(Dachau)'로 이송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그곳에 반나치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당원 등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억류했습니다.

 

독일 군인이 유태인이 운영하는 가게 앞에 낙인 하는 모습 

'히틀러'의 생각으로 1차 대전과 독일의 패배, 독일의 심한 인플레이션, 실업의 원인이

유태인에게 있음으로 다음에 치러질 전쟁은 유태인에 대한 전쟁이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히틀러는 독일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은 나치 독일로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먼저 자기 고향부터 시작했죠. '안슐루스(Anschluss)' 즉 합병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과 똑같은 공포시대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렌츠 근교에 있는 가장 마흐트하우젠에 가장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그다음 희생국은 어디일까요? 인접한 체코슬로바키아?

스테텐 지역에 독일인들이 살고 있긴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 나라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서막>

 

독일 군인

전쟁의 기운이 모입니다. 

나치즘의 중심지인 뮌헨에서 11시간째 평화회의가 진행 중입니다. 

한쪽엔 점점 악독해지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있습니다. 

 

뮌헨의 평화회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로 전국에 파시즘을 주입했습니다.

 

맞은편은 1차 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지칠 때로 지친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보수주의자의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과 극진 사회주의자인 프랑스 수상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뮌헨의 평화회의

 

이들은 결국 힘든 사안을 승인합니다. 

'체코 슬로바키아'의 '스테텐' 지방을 히틀러로 넘기고 그 대가로 

다른 유럽 국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죠.

 

하지만 히틀러의 약속을 믿어도 될까요? 

겨우 6개월 후 그는 총 사령관 '헤르만 괴링'을 앞세우고 '체코 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에 입성합니다. 

'괴링'은 1차 대전 때 전투기 조종사였고 나치당 창립멤버이며 이젠 공군 지휘관이죠. 

 

프라하에 입성한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이제 히틀러에겐 독일어권의 재결합이란 명분이 필요 없습니다. 

체코의 막강한 산업이 그를 뒷받침할 테니까요.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연합국이 이를 허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히틀러'의 맞서는 인접 강대국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와는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상태 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공산주의 러시아와 그 위성 공화국들의 공식적인 이름입니다. 

 

소련의 여성 군인들

붉은 광장에서 대중을 다루는 것을 보면 '스탈린' 독재정권의 잔인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수백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인 '블라흐'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중국에 압박한 것도 바로 '스탈린'이었죠.

 

'이오시프 스탈린'

산업화와 강제적인 군사화를 통해서 소련은 주요 강대국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서구 열강들은 소련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이제 하나씩 이들을 제압하기로 합니다. 

1939년 여름 그는 '베르히데스가든'에서 외무장관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와 함께

 '차단 작전'을 준비합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로 하고 나치당원인 '리벤트로프'를 모스크바로 보내

최악의 적국(소련)과 역사적인 조약을 맺게 했습니다. 

 

스탈린 정권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독소조약에 서명하는 장면

'스탈린' 정권의 외무장관인 '몰로토프(Molotov)가 '독소 조약'을 체결하자

유럽대륙은 크게 당황합니다. 

 

이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 이유는 뭘까요?

소련은 '스탈린'이 시간을 끄는 사이 '히틀러'와 서구 열강들이 서로를 잡아먹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폴란드 일부를 장악하려는 '스탈린'은 

'히틀러'와 둘이서 유럽을 영원히 나눠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을 겁니다. 

 

1936년 미국 국회는 또다시 유럽 전쟁에 끌려들어 가지 않기 위해서 중립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나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히틀러'는

이 기회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겪어야 했던

최악의 굴욕을 설욕하려 합니다.

 

독일을 둘로 나뉘게 했던 단치히 자유시

바로 '단치히' 자유시이죠.

 

1919년 독일 영토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바다를 통해 폴란드로 들어가기 위해서죠.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과 '단치히' 수복을 결정했습니다. 

 

때는 1939년 9월 1일 오전 5시 35분 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대포가 단치히에서 발사됩니다. 

 

단치히를 공격하고 있는 독일 전함

 

이제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1939년 9월 1일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움직이기 시작하고 소련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쟁이 흘러 갈까요?

 

다음편은 단치히 수복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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