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2. 히틀러의 유럽 침략...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

 

 

지난 1부-1에서는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독재정권 확립과

러시아와의 불가침 조약인 '독소조약'의 체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대포가 발사된

독일의 '단치히 자유시'의 공격에 대하여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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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작] 제2차 세계대전_1-1부 히틀러의 유럽 침략...

오늘부터 6부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의 선언이나 편지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구성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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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단치히 자유시 공격>

 

1939년 9월 1일 오전 5시 35분 

제2차 세계대전의 첫번째 대포가 '단치히'에서 발사됩니다. 

 

단치히 자유시에서 행진하고 있는 독일 군인
독일 군인의 행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단치히 폴란드 시민

 

사실 '히틀러'는 프랑스와 영국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양국 정부는 즉시 만나서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행위를 중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에 보냅니다. 

 

'히틀러'는 선언합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다. 단치히를 목표로 한 세계대전에 누가 감히 발을 담그려 하는가?"

 

이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1939년 9월 3일 이날 오전 11시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는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폴란드에서 독일 군인을 격려하고 있는 '히틀러'

 

'히틀러'는 믿기기 않았습니다. 이제 독일 장군들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했습니다.

2개 국가와의 전쟁이었죠.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습니다. 

 

히틀러는 나치독일의 국방군인 'Wehrmacht(베어마흐트)'를 폴란드로 파견하였습니다.

 

폴란드도 즉각 대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치 먼 옛날의 전쟁처럼

기마대가 독일 탱크를 맞이했고 이들은 결국 전멸합니다. 

독일 병사와 싸우고 있는 폴란드 기마대
전멸한 폴란드군

독일의 단치히 자유시의 공격으로 폴란드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의 독일과 폴란드는 신식 총기를 들고 있는 일본과, 활을 쏘고 있는 조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대응>

 

파리의 갸르드레스트 기차역
프랑스 징집병들을 배웅하고 있는 가족들

파리의 갸르드레스트 기차역입니다. 

이중 많은 이들은 25년 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서 기차를 탔습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3일 이 날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죠.

1914년 8월 프랑스 사람들은 총에 꽃을 달고 씩씩하게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1939년 9월 3일엔 꽂은 없고 심지어 총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400만 명의 남자들이 징집되었습니다. 

 

걸어서 국경으로 향하는 프랑스 병사

이들은 걸어서 독일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장교들은 말을 타고 뒤따랐죠.

차량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단단한 고무타이어가 달린

이 구식 트럭을 몰았던 프랑스 병사 가스통 시랭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물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트럭 한대마다 2인당 소통 한정에 탄약 10개들이 상자 하나였고 상자는 뜯으면 안 됐다. 정말 딱했다. 필요한 물자만 있으면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보쉬들과는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보쉬는 1차 대전때 독일군을 낮춰 불렀던 격멸적인 호칭입니다. 

'베르드 그리'라고도 불렀죠. 프랑스 말로 회색 들판이란 뜻인데

독일 군복이 회색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군은 1939년 9월 7일에 공격합니다.

선전포고를 한지 나흘 후였죠.

 

이 공격은 폴란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의견을 보여준 것으로

자하르 지역까지 8km를 진군합니다.

 

프랑스국의 영화국이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들은 즐겁게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독일에 버려진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프랑스 군이 획득한 자전거 전리품

프랑스 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이 후퇴하여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음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자하르 공격은 거기서 멈췄고 최정의 게릴라들이 이어가는

일련의 소규모 전초전으로 전쟁은 변질되었습니다. 

 

이를 이끈 영웅 '조제프 다르낭'은 프랑스 최후 선군인이란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독일군에 가장 열렬히 협조하는 프랑스 군이 되고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처형됩니다. 

 

프랑스 군은 전쟁영웅도 많고 숫적으로도 우세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67 세의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합참의장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영국 합참의장 모리스 가믈랭

그는 이 전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가믈랭'은 1914년의 전쟁을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떡해서든 이 끔찍한 학살극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노선 뒤에서 2년 동안 안전하게 버티면서 

군대를 재 무장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노선은 전직 국방성 장관인 '앙드레 마지노'의 작품입니다. 

마지노선은 독일군을 영원히 막기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건축에만 거의 10년 가까이 걸렸고 무려 150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와

15만 톤의 강철이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 마지노선의 내부

수많은 포탑은 100km에 이르는 미로같이 복잡한 터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지노선의 길이는 720km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벨기에 국경까지 이어지죠.

마지노선은 아르덴 숲 아랫부분에서 끝납니다. 

 

마지노선과 아르덴 숲

프랑스 육군 사령부는 독일의 탱크가 아르덴 숲의

험한 지형을 넘어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죠.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북해까지 연장하지 않은 거은

중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우방이었던 

벨기에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독일을 비아냥 거렸던 지크프리트선위에 있는 빨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독일의 방어선 지그프리트

지그프리트 선은 마지노선에 맞서기 위해 히틀러가 세운 긴 방어선입니다. 

독일군은 공격하지 않고 계속 두 번째 전선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독일은 방어만 하고 절대 공격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도 프랑스 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미리 예방책을 강구합니다. 

그들은 '알자스'와 '로렌'지방 주민들을 동남쪽에 있는 '페리고르'와 '사량트'지방으로 피신시킵니다. 

 

 

<폐허가 된 폴란스의 '바르샤바'>

 

폭격 당하고 있는 '바르샤바'

 

히틀러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에도

정신적 충격을 주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바르샤바' 공습 뉴스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도 나왔고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중연설을 시작합니다.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서 '바르샤바' 공습 뉴스가 나오고 있는 장면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미국 국민에게 중립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중립을 지킨다 해도 사실에 주목할 권리는 있습니다. 
중립을 지킨다 해도 양심을 저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바르샤바'의 공격으로 모든 대도시들은 공습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모든 문화재 건물들은 모래주머니에 보호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 배웠듯 모든 국민은 방독면이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말조차도 방목면을 써야 했죠. 

 

방독면을 쓰고 있는 말

한편 폴란드는 무자비하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히틀러'에게 동의했던 대로 '소련'은 '폴란드'의 동부 지방을 침공했습니다. 

독일과 소련에게 점령당한 폴란드

'독일이 폴란드의 동쪽을 소련에게 넘겨준 이유는

추후 소련의 공격을 용이하기 위해 국경을 맞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죽어있는 폴란드 국민

폴란드 군은 독일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동쪽에선 소련군에게 항복했고요.

그러자 '스탈린'은 폴란드 포로 2만 명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독일과 소련에 항복한 폴란드 군인들

그는 합병할 나라의 최정예 병사들을 제거하고 싶었던 겁니다.  

무려 4천5백 명의 폴란드 장교들이 머리에 총을 맞고 처형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크렘린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망명정부의 수장인 '시코르스키' 수장을 만납니다. 

그는 실종된 폴란드 장교 명단을 가져왔죠.

 

실종된 폴란드 장군 명단을 가져온 폴란드 망명정부의 시코르스키

 

이 살인 행위에 당시 소련은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1992년 구소련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킨'은 폴란드 대통령인 '레흐바흐인사'에게

스탈린이 직접 서명한 처형 명령서의 원본을 전달했습니다. 

 

 

'히틀러'와 친위대 총통 '히믈러'는 이제 폴란드를 직접 돌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치 총독 '한스 프랑크'를 폴란드 점령 지역으로 보냈고 '프랑크'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폴란드 국민의 생과 사를 결정할 권한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독일 장군 '한스프랑크'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으려 했고

비인도적 범죄행위로 교수형이 처해집니다. 

 

독일군이 촬영한 집시 수용소에 억류된 집시 들의 모습입니다.

 

집시 수용소의 집시들

나치의 눈에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은 억지로 불임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치는 집시에 대한 사냥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수천만 명이 집단 수용소에 갇히게 됐죠

 

수용소의 집시들

이제 유태인들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나치는 300만 명의 폴란드 유태인을 잡아드렸습니다. 

 

유태인 표식을 하고 있는 폴란드의 유태인 여성

히틀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았습니다. 

전쟁에 유리하게 진행된다면 그는 이들을 동유럽으로 추방하거나 아예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확실하지 않을 때에만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은 광란의 집단 학살을 펼칠 예정이었습니다. 

바로 최종적 해결이죠.

 

유태인들은 인정을 받은 다음 노란 별 모양의 표지를 달고 강제 거주지인 '게토'로 들어갔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지역

이 불행한 유태인들 중 한명의 일기입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욕적인 폭력 장면을 보니 비통하기 짝이 없다.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거리에서 머리채를 잡힌체 끌려가는 폴란드 여성
길거리에서 나체로 몸을 피하고 있는 폴란드 여성

폴란드의 모든 주요 도시엔 게토 겸 감옥이 들어서서 독일계, 오스트리아계, 체코계 유태인을 수용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유태인들은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몰랐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굶줄임에 죽을지는...

대학살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죠.

 

바르샤바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게토 안에 억류된 유태인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국과 의도적으로 2차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 '히틀러'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충격 요법은 통했고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은 그저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이제 독일은 프랑스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프랑스의 참패'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예정입니다.

독일은 어떻게 몇 배에 달하는 프랑스 영국군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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